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달카날 전역 (문단 편집) == 양측이 지녔던 문제점 == 우선 미국의 경우에는 [[유럽]] 전선인 [[서부전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아시아-태평양 방면 추축군의 경우는 거의 일본군 하나만 상대하면 되지만, 유럽 방면 추축군은 독일, 이탈리아를 비롯해 주요 추축군과 그런 추축군을 돕는 점령지역 괴뢰정부 군대 등등 너무 많은데다 일본은 [[석유]]가 부족해 [[태평양]]을 건너 미국 본토를 타격할 능력도 없었다. 반면 유럽 전선은 이미 [[프랑스]]를 넘어서 최후의 보루인 [[영국]]이 노출된 상황으로, 추축군이 영국 본토 상륙에 성공한 뒤 점령한다면 이를 바탕으로 [[대서양]]에 진출하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과 워싱턴 DC를 비롯한 동부가 직접적으로 위협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새로 조성된 병력이나 물자, 병기의 상당수가 [[유럽]]으로 향하고 있었다. 태평양 함대에서 작성한 보고서에서는 태평양 전선이 받은 지원을 15%로 명시했고, 이것도 태평양 함대가 엄살을 부린 것이라는 말이 정설로, 대개 실상은 30% 수준으로 본다. 즉, 유럽과 [[태평양]]에 배정된 물자의 차이는 추정 70%로 2배 이상의 차이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당시 유럽 전선은 독일군의 [[청색 작전]]으로 남동전선이 격화되고 있었고,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도 롬멜의 2차 공세로 연합군이 [[이집트]]까지 밀려가던 중인 상태였다. 잘 알려진 [[무기대여법]]이 본격 가동되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시점으로,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의 경우 사실상 주력전차가 이때 공여받은 수백대의 75mm [[M3 리]]가 되어 버렸으며, 독일군을 괴롭힌 사막공군의 주력도 미국제 [[P-40]]이었다. 따라서 전력을 우선 투입시키는 유럽전선 상황이 이런 마당에 태평양 전선까지 대대적인 작전을 펼치기에는 아직 무기와 병력, 그리고 병력을 수송할 수송함도 모자랄 정도로 어딘가 모자란 것이 많은 상황이었다. 일본군이 해당 섬에 비행장을 짓기 시작하면서 다급해진 태평양 전선을 담당한 사령부에 의해 갑작스럽게 작전이 결정된 까닭에 '''제대로 준비된 것이 거의 없었다'''. 장비도 [[제1차 세계대전]] 때 쓰던 [[스프링필드 M1903]]들 뿐이고, 게다가 과달카날 상륙을 책임질 해병 제1사단은 6월 중순에 열심히 태평양을 건너오고 있었다. 원래는 상륙훈련을 받고 투입될 예정이었는데, 다급해진 미군이 그걸 취소시켜버리고 곧바로 출발시켰기 때문에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했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그래서 미군 병사들은 Operation Shoestring. 즉 '신발끈 작전'이라고 부르면서 자조했다.[* shoestring에는 신발끈 말고도 '빠듯하다', '아슬아슬하다'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면 '허리띠를 바싹 조이다' 쯤으로 보면 된다. 한때 미국에서 Europe on a Shoestring이라는 여행 가이드북이 인기를 끌었는데, 책 제목을 번역하면 '존나 저렴하게 유럽 여행하기'라는 뜻이다.] 또한 과달카날 지역을 담당하는 남서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이 [[육군]] [[장성급 장교|장성]]인 [[더글러스 맥아더]]였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맥아더 입장에서는 해군 놈들이 자신들 영역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 뻔했고, 태평양 함대의 제독들도 "큰소리나 뻥뻥치는 밥맛" 정도로 여기던 맥아더의 지휘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워싱턴의 수뇌부는 한참 동안 수군거린 끝에 과달카날을 태평양 함대 산하의 남태평양 해역군의 작전 지역으로 밀어넣는 것으로 문제를 덮으려 했다. 더불어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으로 누굴 임명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수면에 떠올랐는데,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당시 요양을 마치고 일선에 복귀 예정이던 [[윌리엄 홀시]] 제독을 추천했다. 하지만 미국 함대최고사령관 [[어니스트 킹]] 제독은 평소 눈여겨보던 로버트 곰리 제독을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으로 지명했다. 그리고 이는 킹 제독 최악의 인사로 기록되고 말았다. 인사결정을 내리던 당시에는 곰리 제독은 해군 내에서도 꽤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으나, 실제 전선에서는 참모를 맡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격전지의 엄청난 부담감을 짊어지기에는 한계가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이라고 해서 사정이 낫다고 할 수는 없었다. 미국에서는 육군과 해군의 대립이 그저 자존심 대결 내지는 워싱턴에서의 정치질 정도였지만,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은 [[2.26 사건|아예 내전 직전까지 갔던]], 그냥 한 지붕 아래 사는 원수 사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때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을 어떻게든 빨리 끝내기 위해서 [[중국]]에 있는대로 부대를 들이붓고 있었기 때문에 과달카날 쪽으로 돌릴 병력이 부족했지만, 애초에 과달카날이 공격당했다는 정보를 받아도 그 반응이라는 게 "해군이 비행장을 만들었으니 그건 그 쪽 소관이고 우리는 그 섬이 뭔지 알 바 아닌데?" 수준이었다. 게다가 일본 해군은 과달카날에 비행장을 건설하면서도 최고지휘부인 [[대본영]]에도 통보하지 않았다. 그 결과 과달카날이 미군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대본영 육군부는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섬이 공격당했다는 사실에 황당해했으며 그 전략적인 가치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과달카날은 일본 항공력을 동원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기에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가령 항속거리가 가장 긴 축에 속하는 [[A6M#s-7.2|영식함상전투기]]조차 과달카날에서 가장 가까운 기지인 라바울에서 날아와서 체공시간이 30분도 채 되지 않았으며 그 외 [[전투기]]나 [[뇌격기]], 급강하 폭격기 같이 [[미국]]의 보급선단을 저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전력들은 사실상 왕복이 불가능한 장소였다. 드라마 [[영원의 제로]]에서도 관련된 장면이 나오는데, 가장 가까운 라바울에서 과달카날까지는 약 560해리, 약 1030km 정도인데, 라바울에서 출발해 8시간을 날아 과달카날까지 가고, 거기서 미군과 혈전을 펼치고 다시 8시간을 건너 라바울로 복귀하는 살인적인 스케쥴이었다. 운 좋게 귀환하기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연료가 떨어지거나 피격당해 격추라도 됐을 경우는 운이 좋아야 섬에, 아니면 남태평양 바다 속으로 직행이었다 게다가 과달카날에서 전투가 지속될 경우 병력과 물자를 보급해 줄 여력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즉, 일본 해군에겐 과달카날은 전략상 중요한 지점인 것은 맞지만 확보도 어렵고 확보해도 유지가 어려울 곳에 무리해서 손을 뻗친 계륵같은 곳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